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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시

대대포에 들다/천양희

by Lamsa 2019. 8. 26.

갈대의 등을 밀며 바람이 분다 개개비 몇 발끝 들고 염낭게 갯벌 물고 뒤척거린다 날마다 제 가슴 위에 거룻배 한 척 올려놓는 갈대밭 산다는 건 갈대처럼 천만번 흔들리는 일이었으나 실패한 삶도 때론 무엇인가 남긴다 남긴다고 다 남는 것일까 순천(順天)은 벌써 나를 알아버린 듯 마음의 물결까지 출렁거린다 섬은 발목 잡혀 꿈쩍 않는데 물거품이 해안까지 따라온다 언제 꽃을 바람처럼 피운 갈대들 그들이 환하다 문득 느낀다 내 어둠이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낮게 엎드린 포구 수평선 바라보다 나는 겨우 세상은 공평한가 묻고 말았다 방파제 너머 파도가 밀려간다 밀려간 것은 물결만이 아니다 날마다 내 속으로 밀려온 갈대들 오늘은 대대포에 들고 말았네

 

천양희,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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