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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시

첫새벽/한강

by Lamsa 2019. 8. 24.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문학과 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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