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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시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김민정

by Lamsa 2019. 9. 11.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김민정,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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