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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시

이러고 있는/김경미

by Lamsa 2019. 9. 9.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김경미,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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