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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소설

바람의 열두 방향/어슐러.K.르귄

by Lamsa 2019. 8. 23.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상품 페이지

 

실물로 보면 표지에 홀로그램박이 박혀서 반짝반짝하게 빛이 나는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었다. 총 17개의 짧은 글이 실려 있다. 어둠의 왼손을 먼저 읽었는데, 이 책을 그보다 더 먼저 읽었어야 했던 것 같다. 왜 총서를 기획하고 양장본으로 다시 만들면서 바람의 열두 방향에 3번을 붙인 건지는 모르겠다.(표지가 아니라 책 등에 03이라고 적혀있다.) 아마 영화도 본편이 흥하면 프리퀄을 나중에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처럼 출판사 직원들이 책도 그렇게 읽게 하면 좋으리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미리보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그 아이디어에 찬성하지 않는다. 물에 들어갈 때 발부터 담그는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어슐러의 글은 인간 행동 실험 일지를 조금 문학적으로 풀어 쓴 느낌이 든다. 다양한 환경과 개인적 배경을 설정하고, 지성체인 인간을 거기에 던져둔다. 그리고 이 작은 인간들이 어떻게 서로 또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는지를 보고 적는다.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어도 결국 우리는 거기에서 인간을 발견하고야 만다. 외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즐거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곧잘 찾아내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다른 것과 부딪힐 때 비로소 자신이 어떤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혼자서는 비교할 대상이 없는 까닭이다. 다른 것이 되어본 적이 없지만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과 지식 중 어느 한 가지만 바뀌어도 낯선 세계가 된다. SF가 재미있는 이유다.

 

이 책에서는 길의 방향이 흥미로웠다. 두 세쪽 정도 읽다가 다시 돌아가야 했다. 나무가 뛰고 늘어나고 줄어든다는 표현은 낯설지만 우리가 관찰하게 되는 현상으로 보면 맞는 말인 점이 재미있다. 문득 자동차 백미러에 적혀있는 말이 생각났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아마 백미러에 그 문구가 생기고 나서는 나무들이 더 골치를 썩게 되었을 것 같다. 교통 체증은 나무들에게 있어 한숨 돌릴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입수 순서가 좀 바뀌긴 했지만 물놀이는 즐거운 법이다. 어슐러가 중간 중간 첨언한 간지들도 읽는 재미가 있었다. 요즘 말로 말하면 비하인드 컷이라고 해야 하나, 감독 인터뷰같은 짤막한 글들이었다. 이 작품을 찍을 때는 어떤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찍었다는 걸 작가 본인이 적어둔 페이지들을 읽으니 괜히 친밀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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